대한사진 예술가협회 입회와 사진예술
김완기 Kim wanki
내가 오늘날 사진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사진작가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대한사진예술가협회와 백오 이해선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대한사진예술가협회와의 만남
내가 25세였던 1969년 1월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던 길음동에 있는‘기술사’라는 DP&E점을 찾았을 때 주인이었던 손승옥씨가 내가 찍어온 사진을 유심히 보다가 “김 선생님 사진을 참 잘 찍는데 혹시 나와 함께 작품 활동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하는 우연한 대화가 나를 사진작가로 만드는 계기가 될 줄이야.

DP점 주인 손승옥 씨는 이미 국전입선경력이 있는 사진작가였다. 그를 따라 1969년 1월 15일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월례회에 옵서버로 참석했다. 지금까지 기념사진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내가 이날 처음으로 사진예술의 세계를 맛보게 되었고, 이 날 회장이신 백오 이해선 선생님의 지도말씀에 너무나도 감동되어 즉석에서 대한사진예술가협회에 입회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사진예술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사진예술 감각은 대한사협을 통해 키워졌고 지난 45년 동안 내 사진작업은 이해선 회장님이 추구하는 순수사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예술의 선구자 백오 이해선 선생님
백오 이해선 선생은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재종질로 1930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처음에는 고희동선생의 추천으로 회화협회 멤버가 되었다. 1936년 ‘한국인 중심의 첫 사진단체’인 경성아마추어카메라클럽의 지도위원을 거쳐 회장과 고문을 역임했으며, 1939년에는 백양사우회 지도위원을 맡았다.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1945년 9월10일 해방과 더불어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와 백양사우회의 중견회원과 지방의 사진인들을 규합하여 조선사진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는데 창립회원은 김정래, 박필호, 현일영, 이규완, 오인창, 이태웅의 6명이었다. 백오 이해선 선생은 창립당시 지도위원을 맡았으며 그 후 지속적으로 후진양성과 사진예술풍토 조성에 헌신하였다. 우리나라 사진문화개화기에 사진5로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분이었다.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대한사진예술연구회’로 개명하였고 1957년 ‘대한사진예술가협회(약칭:대한사협)’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일시정지되었다가 1962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산하단체로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창립될 때 중진회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1964년 문화단체 활동이 재개되자 이해선 선생은 다시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재건하여 오늘날까지 역사가 이어지게 하였다.

백오 이해선 선생은 창립 후 여러 차례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을 지냈고 한동안 명예회장을 역임하다가 생을 다하는 날까지 고문으로 참여하면서 협회 육성에 일생을 바쳤다.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백오 선생의 작품세계인 순수사진을 추구하면서 70년 가까이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 깊은 사진단체이다.

내가 19~20대 회장으로 있을 때 전국에 13개 지회를 두었으나 오늘날에는 전국에 9개 지회 500여명이 사진창작활동을 통해 해당 지역의 사진문화 발전에 노력하고 있다.
1974년 11월 이해선선생의 고희기념으로 대한사진예술가협회가 주최하고, 한국사진작가협회가 후원하여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향토풍물 50경을 주제로 ‘이해선 사진작품전’을 열었으며, 이 후 그간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오 이해선 작품집’을 발간하고 1983년에 향년 7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백오 이해선 선생은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통해 많은 사진작가를 배출해냈고 한국사진예술계에 혁혁한 공적을 남기셨다. 1988년에는 덕소의 묘소에 후배 사진인의 뜻을 모아 사진인 백오이해선추모비를 건립하였으며 후학들이 옛 스승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이따금 묘소를 참배하면서 생존 시의 추억을 되새기곤 한다.
흥미로운 사진예술의 세계
자연 속에서 “내 관심을 끄는 사물들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촬영해 놓으면 어떤 모습이 될까?” 이 명제는 내가 사진을 꾸준히 탐구하는 동안 끊임없이 가져온 의문이며 도전의 가치였다.

사진을 배우는 초기에 주된 피사체는 내 주변에서 찾았지만선배들은 사진작품을 만들려면 많은 소재를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사진은 발로 찍는다고 말했다. 초보자 시절 작품을 구상하기에 앞서 소재를 찾아 여러 곳을 쫓아다녔다. 홍수로 물난리가 났던 뚝섬 일대의 수재 현장도, 길거리 노점상 할머니의 진지한 표정도, 죽마고우를 우연히 만나서 반갑게 대화하는 진지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농사철이 되어 농부가 소를 몰고 밭갈이하는 풍경도, 요란한 트럼펫소리를 내면서 구경꾼을 모았던 서커스단도, 작업장에서 인부들의 땀 흘려 일하는 모습도, 소를 몰고 강을 건너는 농부의 모습도, 시골 장날 인간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정겨운 모습들도 모두 훌륭한 작품소재가 되었다.

평생 카메라 백을 둘러메고 사진소재를 찾아 산천을 헤맨 덕분에 오뉴월 개 고뿔도 빼놓지 않고 걸리던 내가 감기를 거의 모를 정도로 건강하게 살고 있다.
창경원을 무대로 촬영에 열중
시간이 없거나 토요일 오후처럼 짧은 시간에는 가장 가까운 창경원을 주로 찾았다.
당시 창경원은 옛 궁궐의 풍채를 그대로 지닌 채 많은 유적과 함께 수목들이 우거져 있었고 우리나라 최대의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어 사진 소재가 무궁무진하였다.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오신 부모님을 모시고 즐겨 찾는 가족나들이 장소이기도 하였다. 향토색 그윽한 시골 노인의 자연스런 인물소재를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동물원에 구경나온 사람들의 흥미진진한 표정을 포착하기가 좋았으며 모든 동식물이 피사체가 되었기 때문에 창경원은 짧은 시간에 다양한 소재를 촬영할 수 있는 단골장소가 되었다.

하루 종일 카메라를 메고 다니던 어느 날 창경원에서 담배꽁초를 입에 문 인상적인 시골 할아버지 한 분을 발견하고 2시간가까이 따라다니다가 드디어 결정적인 찬스를 잡아 ‘꽁초’(사진1)라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차츰 서울 근교로 눈을 돌려
지금처럼 자가용차가 없던 시절이라 주말에도 멀리 촬영 가기가 어려웠고 주로 서울근교에서 소재를 찾곤 했다. 60년대 말에는 지금처럼 빠른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서울 중심지를 벗어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요즘은 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도 하루 종일 걸렸다.
상암동과 난지도는 아직 농촌의 푸근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기차를 타고 수색역에 내려 상암동에서 나룻배를 타고 난지도에 건너가면 넓은 모래밭에 농장이 있었고 장대 같은 포플러 가로수가 줄지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런 풍경사진을 찍기에 좋은 장소였다. 지금은 월드컵경기장이 된이곳에서 ‘상암동길’(사진2)이란 작품을 촬영하였다.

서울시내에서 쉽게 찾아갈 수 있었던 또 다른 근교로는 뚝섬유원지였다. 을지로에서 전차를 타고 뚝섬 종점에서 내린 후 뚝섬유원지까지 걸어가면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당시 뚝섬유원지는 몇 안 되는 한강의 천연 수영장이었고 놀이시설이 있는 서울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기 때문에 예상치 못했던 재미있는 소재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뚝섬유원지에서’(사진3)는 이 무렵의 사진이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시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곳은 송파였다. 을지로에서 전차를 타고 천호동 종점에서 내려 광주방향으로 가는 시외버스로 갈아탄 다음 광진교를 건너 한참동안 들판을 지나가면 농가들이 즐비하고 냇물이 흐르는 송파마을이 있었다.
서울중대초등학교 울타리 밖에 움집이 하나가 있었는데 3형제가 함께 노는 모습을 담아‘움집형제’(사진4)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당시 움집3형제는 다정하고 우애가 돈독해 보였는데 지금쯤은 50대가 되어있을 그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가락동시장이 된 송파 옛 동네에는 초가집이 즐비했고 잘 보존된 농촌마을이었으며 카메라를 메고 찾아가면 아이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라고 모여들었는데 ‘송파의아이들’(사진5)은 생생한 송파의 농가와 아이들 모습을 기록한 역사적 사진이 되었다. 1960년대 말 송파의 서정적이고 역사적인 가록사진은 오랜 세월을 두고 내가 즐겨 돌이켜보는 추억거리이기도 하였다. ‘제2회 김완기사진전’에 출품하였다가 전시가 끝난2004년에 당시 김영순 송파구청장에게 송파의 역사자료로 기증하였더니 지금까지도 송파구청장실에서 잘 보존하고 있다.

봉은사 또한 내가 자주 찾던 사진촬영지였다. 당시에는 영동대교가 없었으므로 뚝섬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논과 밭을 지나고 미나리꽝을 지나 30분 정도를 걸어가야 배 밭 주변에 봉은사가 있었는데 지금처럼 화려하지 않은 옛 모습의 사찰로 사진소재가 많이 있었다. 대한사협에서 야외촬영지로 가끔 찾았던 곳이다.
사진작업에 미쳐버렸던 세월
대한사협에 입회한 1969년은 사진에 너무나 몰두했던 한 해였다. 사진에 미치도록 심취한 나는 사진공부에 열성을 다했다. 매월 흑백 네가 필름 100feet씩 소모하였다. 필름 값을 절약하기 위하여 100피트짜리 영화필름을 암실에서 20커트짜리 빈 매거진에 감으면 33롤이 되었다. 한 달 동안에 그 것도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660커트를 소모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 달 동안 촬영한 사진 중에서 괜찮은 장면으로 수 십장을 골라 매월 월례회 때 백오 이해선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한,두 장만이라도 작품성을 인정받고 트리밍을 받는다면 지난 한 달에는 성과가 컸다고 자평하곤 했을 정도였으니 초창기의 사진예술에 접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실감할 수 있다.

이러한 초창기의 어려움을 비교적 잘 견디어내면서 사진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백오 이해선 선생님이라는 훌륭한 지도자를 만났기 때문이었고 젊은 시절에 비교적 시간여유가 있었던 덕택이라고 생각된다.

방학이 되면 시골 고향근처에서 새로운 소재 찾기에 분주했는데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입회하고 첫 번째 회원전에 출품한‘지름길’(사진6)은 제천역 구내에서 찍었 ‘소일’은 제천장날 촬영한 작품이었다.

해마다 열리는 회원전인 ‘대한사협전’은 각자가 한 해 동안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선보이는 기회였다. ‘아무리 작품 만들기 어려워도 대한사협전에는 훌륭한 작품을 꼭 출품하라’는 백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빠짐없이 회원전에 출품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1969년에 입회하여 제18회 대한사협전에 작품을 처녀 출품한 이후 창립 66주년을 맞는 2012년에 열린 ‘제59회 대한사협전’까지 쉬지 않고 출품하면서 사진예술의 길을 갈수 있었다. 회원전에 좋은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 열심히 창작활동을 거듭한 결과 1980년에는 이해선사진상 작품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우리나라 사진예술의 세계를 개척했던 선구자 백오 이해선 선생과의 만남은 나의 카메라아이를 싹 틔웠고 사진예술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창경원이나 뚝섬유원지가 주 무대가 되었던 초기의 사진촬영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진공부의 단짝은 대한사진예술가협회에 같은 해에 입회하여 지난 45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해온 李政勳 대한민국사진대전 초대작가와 돈암동에서 여생을 늘 우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작품 지도를 해주셨던 故 徐允錫 선생님의 아버지와 같은 깊고 따뜻한 사랑도 잊을 수가 없다.

오늘날 지난 시절의 사진들을 살펴볼 때 철없던 초보자 시절에 진솔하고 참신했던 소재를 선택해서 찍었던 흑백사진에서 더욱 재미있는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 시절의 진솔했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7개월 만에 건져낸 걸작사진
1969년 1월에 대한사협에 입회하여 매달 30여 롤의 필름을 소모하여오던 중 7월말에 여름방학이 되자 카메라 백을 메고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실어 조치원역에서 내렸다. 조지원에서 충주까지 충북선을 따라 3박 4일간 충청북도를 도보로 횡단하면서 촬영에 몰두하였다.

마지막 지점에 이르러 충주 대수정 다리 밑에서 사진작품을 시작한지 7개월 만에‘노인회석’이라는 작품을 건지게 되었다.

다리 밑 그늘에서 여러 형색을 한 노인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들이 가지고온 지팡이와 모자들이 시멘트벽에 나란히 걸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이거다 하고 한 커트를 찍었던 것이다. 지팡이와 모자는 많은 이미지와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누구나 늙음이라는 인생의 항로에서 지팡이와 모자가 주는 이미지는 주인공의 일생을 함축된 의미로 담아내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큰일에는 산고가 따르는 법이던가. 나를 간첩으로 신고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촬영이 끝나고 시간여유가 있어 인근에 사는 친구 집을 방문하였다. 친구가 대문까지 나와서 함께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경찰관이 대문을 두드리며 “지금 바로 카메라를 멘 수상한 사람이 이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느냐?”고 묻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친구가 “서울에서 온 내 친구”라고 하면서 나를 경찰관에게 소개시켰더니 신분증을 좀 보자는 것이었다. 신분을 확인하자 거수경례를 붙이고 돌아가는 경찰관 이야기가 “수상한 사람이 긴 망원렌즈를 달고 다리 밑에서 이상한 사진을 찍었다”는 주민신고가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의 우리나라 안보상황으로는 큰 카메라를 메고 지저분한 곳을 촬영하다보면 가끔 간첩으로 오해 받아 신고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백오 이해선 선생님의 깊은 사랑
이런 사연을 간직한 이 작품이 8월 월례회에서 우수 작품으로 뽑혔다. 생각도 못했던 성과에 무척 가슴이 설레었다.
월례회의 작품평가를 마친 뒤 백오 이해선 회장님과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김군!, 자네 입회한 지 얼마나 되었지?”
“금년 1월에 입회하였으니 8개월이 지났습니다.”
“자네 작품은 국전에 내더라도 입선 할 수준은 되는데 이번 국전에는 출품할 생각 하지 말게!”
“예, 알겠습니다.”
“대개 한 3년쯤 열심히 사진공부를 한 다음 국전에 도전하는 것이 보통이니, 내 말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알겠습니다.”

며칠이 지났다. 국전출품마감이 일 주일정도 남았을 때 마지막 월례회가 열렸다. 이해선 회장님께서 다시 물어보셨다.

“자네 이번 국전에 한번 출품해보고 싶은가?”
“회장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한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만...”
“지난번에 자네에게 출품할 생각 말라고 한 것은 너무 빨리 국전에 입선되면 혹시 자만심이 생겨 사진공부를 게을리 하게 될 우려가 있고 오만해져서 큰 작가로 성공할 수 없게 될까 걱정되어 했던 말일세!”
“회장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깊이 걱정해주시는 뜻을 새겨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이해선 회장님께서 먼 장래를 내다보시고 내게 주신 깊은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서도 사진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였다.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입선‘노인회석’
백오 이해선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내 손으로 정성껏 작화하여 국전에 출품했다. 흑백사진밖에 없었던 그 시절에는 자신이 촬영한 필름을 직접 현상하고 인화해서 작품을 제출해야 제대로 사진작업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총각시절 단칸 전세방은 밤에 창문에 커텐을 치면 자연스런 암실이 되었지만 가난한 사진학도의 책상 위에는 그래도 오메가 확대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대형사진 작화에 필요한 현상약품을 담는 바트도 구입하기 힘들어 노광을 마친 인화지를 방바닥에 깔아놓고 깨끗한 수건에 현상액을 묻혀 골고루 문지르면서 현상을 하여 정착액에 담근 다음 수돗가에서 씻어내었다. 작화과정이 좀 구차하지만 정성을 다해 작업을 마쳤다.

이렇게 하여 25세 때 협회에 입회한지 8개월 만에 노인회석(老人會席)(사진7)이란 화제로‘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에 입선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백오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과 가르침이 받아 한 길로 열심히 노력했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백오 이해선 회장님께서 국전출품을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가장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는 참여할 수조차 없었을 뻔 했다. 왜냐하면 다음해에는 국전이 열리지 않았고 그 다음해부터는 전람회 명칭이나 방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 내 사진 경력의 첫 이정표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세워졌던 것이다.
왕성한 사진창작활동과 한사전 특선 ‘무아’
국전에 입선한 후 1970년대는 나의 사진예술이 크게 발전을 거듭했던 시기였다. 해마다 열심히 사진을 찍었지만 노인회석과 같이 국전에 출품할만한 명작은 나오지 않았지만 대한사협전에는 출품을 계속하였다.
국전에 입선한 다음해인 1970년에는 기계체조 텀블링하는 모습을 슬로우 셔터로 ‘유선’(사진8)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무렵 진기한 소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경기도 일원의 장날을 찾아다니는 일일이 많았는데 ‘안성장날’(사진8)은 이 때의 사진이다.

한동안 격무로 인해 국전과 같은 공모전에는 출품할 수 없었지만 카메라아이가 녹슬지 않기 위해 결코 카메라를 놓은 적은 결코 없었다.
1980년대 여름 한강의 날 기념행사에서 당시 자신이 만든 한강도하 장비인 물신을 신고 한강 물위를 걸어 다녔던 물신 할아버지가 조정선수와 같은 공간에서 자신이 만든 작은 보트를 타는 이색적인 퍼레이드를 벌였다. 같은 공간에서 여러 명의 젊고 힘찬 조정선수와 혈혈단신 늙고 나약한 할아버지의 이미지가 강력하게 대비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여 ‘노소동락’(사진9)이라는 주제의 사진을 만들 수 있었다.

그 후 되살아난 사진창작열기로 국전이 한사전으로 바뀐 뒤에도 꾸준히 도전하여 여러 차례 입선하였고 1997년 향일암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종 뒤에 숨겨 촬영한 ‘무아(無我)’(사진10)라는 작품이 제17회 대한민국사진대전에서 특선으로입상하기도 하였다.
자작 흑백사진의 추억
지금은 한사전초대작가가 되어 한사전을 비롯한 전국사진공모전의 심사를 하고 있으면서 디지털카메라와 포토샵을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지금 다시보아도 초보자시절 진솔한 소재를 찾아 손수 만들었던 흑백사진이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아마도 내가 백오 이해선 선생님을 만나 확고했던 사진정신을 본받아 역사 깊은 대한사진예술가협회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철집 회장에 거는 기대
이제 새로 출범하는 대한사협의 이철집 회장시대를 열면서 지금까지 대한사협의 전통을 바탕으로 변화,발전해가는 사진사조에 발맞추어 힘찬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기를 크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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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0~70년대의 아이들 2015-04-22
대한사진 예술가협회 입회와 사진예술 2013-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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