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기록매체인 사진을 예술적 표현도구로 확장시키는 데 상당한 노력과 역할을 한 분이 백오 이해선 선생이다.

1950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 선생의 추천으로 서화협회 회원으로 가입·활동하면서 사진예술 연구에도 열정을 기울여 사진작업도 병행하였다.

“1936년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를, 1939년에는 백양사우회를 조직하여 후진들을 지도하는 한편, 사진을 통한 일제에의 저항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광복 후에도 위 두 클럽의 중견회원들을 중심으로 전국 규모의 단체인 조선사진예술연구회(현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창립하여 계속 후진들을 지도·육성하는 등 사진의 예술풍토 조성에 열과 성의를 다하였다.”(박필호 선생의 축사중에서)

백오 선생은 여명기 한국 사진예술의 길을 개척하고 넓혀 오면서 수많은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선생이 몸담았던 서양 화단의 반대와 질시를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였다. 사진을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시도조차도 달가워하지 않았던 시절에 서양화가가 사진가로 전향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화단은 선생을 애써 무시하려 하였고, 동경미술학교 선후배는 물론 동기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또한 선생은 직업사진가의 길이 아닌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주장하였다. 사진작품이 상업화랑에서 전시되거나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더구나 선생은 작품을 상품으로 내놓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경제적인 곤란을 감내해야만 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말,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연구 월례회에서였다. 대한 사진동아리를 같이 만들고 활동하던 친구가 「제16회 대한사협전」 (1967.11.)에 사진을 출품하게 되어 전시 작품을 보고 난 직후였다. 연구 월례회에서는 30여 명이 모여 준비해 온 사진들을 벽에 붙여 놓고 선생의 품평을 들었다. 좋은 평을 듣는 작품도 있었고, 주제에 대한 해석과 표현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 주며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도 하였다. 허름한 중국집 2층에서의 모임이었으나 그곳에는 열정과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나는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끝날 무렵에 준비해 간 10여 점의 8×10프린트를 따로 보아 주셨다. 대체로 내용은 좋으나 표현이 서툴다 하였으나 고향집 근처에서 찍은 녹두덩굴 사진은 “선의 구성이 잘되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 후 한 달여 뒤에 열린 「종합미술전시회」(1968.1)에 ‘선(Line)’이란 화제를 붙여 출품하게 되면서 나도 대한사협의 연구회원이 되어 선생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세계적인 사진가들의 작품집과 사진서적을 통하여 사진사조의 흐름과 사진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또 사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심해 왔기 때문에 선생의 지도방법에 다소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초지일관 “시각언어로서 사진의 표현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조형문법을 습득하고, 대상(피사체)과의 교감을 통하여 내면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돋보이게 구성하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독려하였다. 선생의 이런 교육방법은 중·고교 시절 입시준비로 제대로 미술수업을 받지 못한 나에게 미적 감흥과 감각, 디자인 능력을 함양시켜 보려는 선생의 처방이었을 것이다. 내 속에 잠재된 조형 역량을 키워주려는 선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생의 생전에 선생을 꽤나 귀찮게 하는 제자였다. 내가 선생에게서 조형 훈련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문화유산 속 상징성과 미적 감흥을 표출해내는 나의 작업은 선생으로부터 받은 기초 훈련 덕분이다.

선생이 운명하시기 3일 전 병실을 찾았을 때, “선생님, 빨리 일어나셔서 다시 호통을 쳐 주셔야지요”하니 싱겁게 웃으시며 “또 사진 던진다고 덤벼들려고…”하신다. 선생께서는 성의 없이 찍어온 사진은 용서하지 않았다. 육십 대의 제자가 가져온 사진이라도 생각 없이 쉽게 찍어 온 사진은 집어던지며 호통을 치곤 하셨다. 작품을 대하는 안이한 태도를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선생의 첫 사진집 서문에서도 “사진예술이란 미디어의 특성으로 보아 사실적인 표현이어야 하되, 그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감성적 해석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예술적인 승화를 꾀하여야 한다.”는 선생의 신조를 밝혔듯이, 촬영대상, 즉 주제에 대한 작가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예리한 관찰을 강조하곤 하였다. 주제로부터 받은 느낌을 내속에서 완전히 용해시켜 내면의 감흥을 토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

선생의 고집스런 예술관은 선생께서 살아온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잃어 가던 1905년, 선생은 서울 가회동에서 이달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할아버지 흥완군은 흥선대원군의 동생이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과는 6촌간이며, 고종황제는 당숙이 된다. 요즘 말로 로열 패밀리다.

또한 충정공 민영환의 따님과 결혼하여 민영환의 공의 사위가 된다. 그러나 선생의 성장기는 나라를 빼앗긴, 그것도 몰락한 왕족의 삶을 살아야 했다. 선생이 그림을 그린 것도 조그마한 자유라도 얻어내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동경유학 시절, 새로 등장한 사생도구인 카메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선생의 사진인생도 시작된 셈이다.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면서 전공인 유화작업을 계속한다. 남아있는 유화작품을 보면 주로 정물과 누드를 즐겨 그린 것 같다. 인물화는 미술학교 졸업 전에 전시한 자화상을 볼 수 있다. 학생 때의 모습에서도 고집스러운 면모를 드러낸다.

1932년, 당시 창경원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에서 한국 고미술품 관리위원을 맡게 되고, 1934년, 덕수궁 석조전에 새로 들어선 이왕가 덕수궁미술관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쇠락해 가는 궁궐(선생은 보통 ‘대궐’이라 하셨다)의 건물과 석물들을 촬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찍어 놓은 귀중한 원판들을 6·25전쟁 때 피란을 떠나지 못하여, 인민군의 요구대로 원판을 넘겨줄 수 없어 모두 불태워 버려야 했던 쓰라림은 선생의 초기 작품을 볼 수 없는 한국사진사의 큰 손실이기도 하다.

1936년에는 현일영, 박영진, 임병기, 이규완, 이성윤 등과 뜻을 보아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를 창설하였다. 이는 일본인들의 독무대였던 사진계에 한국인들만의 사진단체를 조직하여 아마추어 사진인을 지도·육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백오 선생이 사진 예술의 길로 매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선생이 사진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조국이 광복을 맞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9월, 전국 규모의 중견 사진가들을 규합하여 조선사진예술연구회를 발족한다. 지금의 대한사진예술가협회의 전신이다.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예술에 쏟는 정열과 애정이 깊어질수록 전국의 사진가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여 명실 공히 전국적인 사진단체로 성장하였다. 정부는 1961년 5·16쿠데타로 모든 예술단체를 해체시켰다. 이에 1962년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를 새로 발족해 그 산하에 한국사진협회를 창립하여 사진단체를 하나로 묶었다. 1964년, 문화단체 활동 해금령이 내려지자 백오 선생이 앞장서서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다시 일으키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오 이해선과 대한 사협은 하나의 등식으로 불릴 만큼 선생의 공헌이 크다.

선생은 나라 잃은 왕가의 후손으로, 억압받는 관리대상으로 성장기를 보냈으나 일제가 그에게 던져 준 남작 칭호를 거부함으로써 광복 이후 선생의 활동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영친왕의 귀국 후,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에 머물 때 선생은 왕실의 일원으로 문안을 하곤 하였는데, 하루는 내가 선생을 따라 낙선재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슬픈 역사의 주인공들의 만남을 보면서 선생이 지고 가는 무거운 짐을 보게 되었고,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듯하였다.

선생의 삶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왕손으로 큰 혜택을 누리고 왕손이기에 대접을 받고, 사진계도 선생을 윗자리에 모셔 온 것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16년 동안 선생의 노년을 모임에서, 가끔은 안국동 자택에서 지켜보면서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버티시는 한 예술가의 눈물겨운 고통과 고독을 보았을 뿐이다.

선생이 사진예술의 길을 열어 주어 후배들은 요즘 덜 고단한 길을 가고 있으나, 선생이 화필을 던지지 않았더라도 저리 고생하며 푸대접을 받았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선생의 가시밭길에 아무 힘도 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남는다.

선생은 평소 커피와 담배를 무척 즐기셨다. 주머니가 가벼운 제자들은 명절에 인사드리러 가더라도 담배 한 보루나 커피 한 병 사들고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생은 손수 버너에 불을 피워 주전자의 물을 끓인 후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채워 주시곤 하였다. 선생을 생각할 때면 그 커피 맛이 그리워지고, 함께 마시며 사진 이야기를 나눌 때의 그 흐뭇한 표정이 떠오르곤 한다.

선생은 골초는 아니었으나 하루 반 갑, 어떤 날은 한 갑을 다 피우기도 하였다. 건강을 위해 금연을 권유하면 일흔 넘게 살았는데 조금 더 살자고 즐거움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고 하신다. 결국 폐암으로 78세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선생은 수석과 분재에도 관심이 많았다. 수석을 즐기는 동호인들과 탐석에 동행하여 직접 수집해 오시기도 하였다. 선생의 심미안을 잘 아는 동호인들이 수집해 온 돌들을 선생에게 보여드리며 선별을 청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수집품 중에서 아끼는 수석을 제자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선생의 수제자인 안준천 교수는 여러 점을 물려받았고, 나에게도 선생의 손때가 뭍은 산소선을 집들이 선물로 주시기도 하였다. 선생의 분재사랑도 남달랐다. 선생의 첫 번째 착품집 첫머리부터 불발기창으로 스며든 빛에 분재 둘을 배치하여 멋진 조화를 이룬 작품을 찍어내었듯이, 선생은 분재를 피사체로 즐겨 촬영하였다. 자택의 조그마한 앞마당에는 선생이 애지중지 하는 분재들이 늘 가지런히 놓여 햇빛을 쬐고 있었다.

선생은 평생 흑백사진만을 고집하였다. 초기 컬러 사진의 발색이 유화물감처럼 자유롭게 색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겠으나 “흑백사진은 사물이 지닌 모든 고유색을 흑백만의 추상세계로 바꾸어 놓으며, 농담의 계조, 빛과 그림자가 연출하는 뉘앙스에 각별한 매력을 느낀다.”는 선생의 선택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에 새로운 감광유제의 개발로 컬러 발색의 폭이 넓어지고, 색온도 변환 필터와 색보정 필터의 적용으로 원하는 색상을 얻을 수 있다고 컬러사진을 찍어 보실 것을 권유해 보았으나, “자네는 열심히 연구해 보라”며 웃으시곤 하였다.

1974년 11월, 선생의 고희기념 「이해선 사진작품전」이 대한사협 주최 한국사협 후원으로 신문화관 화랑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가 선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이 되었다. ‘향토 풍물50경’을 주제로 선생의 사진인생 청산전이 된 셈이다. 전시 준비과정에서 작품집 발간을 논의하였으나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실행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았다.

또한 선생께서는 6·25전쟁 와중에 필름을 모두 태워 버려야 했기 때문에 새롭게 사진촬영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상당량의 작품을 갖고 있었다. 특히 궁궐 사진은 건축물과 석물로 나누어 정리해 놓았다.

1980년 봄, 윤주영(전 문화공보부 장관)씨가 백오선생에게 사진공부를 하면서 선생께서 공들여 준비해 놓은 궁궐 사진을 책으로 엮어내었으면 좋겠다며 문화재관리국을 소개해 주었다. 내가 출판의 실무를 맡아 문화재관리국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궁궐건축편은 『한국의 고궁』으로 출판하기로 결정되었으나, 궁중석물편은 예산문제로 추진할 수 없었다. 선생께서 꼼꼼히 배열 순서와 레이아웃까지 손수 챙겨주셔서 편집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인쇄공정에서 인쇄소에의 늑장과 무성의로 교정지도 내주지 않아 내가 직접 제판 필름을 수정하여 다행히 연말을 넘기지 않고 선생의 첫 저작물을 출간할 수 있었다. 글은 신영훈 씨가 백오 선생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담아 썼으나, 글쓴이를 따로 밝히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여 책에는 밝히지 않았다. 이 기회를 빌어 신영훈 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한국의 고궁은 그 후 문화재보호협회에서 추가 인쇄를 거듭하며 궁궐건축 연구와 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보수 과정에서 없어진 경복궁 자경전 뒤뜰 십장생 굴뚝의 연돌이 선생의 책 덕분에 되살아났고, 지금 보물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다.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소정의 저작료를 선생에게 지불하였고, 그 저작권료를 재원으로 선생의 사진작품집도 발간할 수 있었다.

『이해선 사진작품집』은 선생의 소희기념 사진전에 발표한 50점에 60점을 더하여 120쪽의 아담한 책이 되었다. 이 책의 편집도 선생께서 손수 하였다. 책에 정가를 붙여 판매할 것을 권하였어나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후배 사우들의 눈을 더럽힐 수도 있는 책을 판매할 수 없다” 하여 비매품으로 나누어 주었다. 선생의 그 사진집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생의 작품세계를 회화주의적 살롱사진으로 규정지어 온 것이 얼마나 잘못된 선입견인지를 그 사진집은 보여준다.

2005년 가을, 백오 이해선 선생의 탄신 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한사진예술가협회에서 선생의 유작전을 열어드리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선생의 생전에 출판하지 못한 궁중석물편을 책으로 엮어보려 하였으나 선생께서 직접 선정하여 정리해 놓은 원고를 찾지 못하였다. 전체 사진원판 중에서 다시 골라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윤주영 님께서 선생의 모든 원판을 밀착인화하여 번호순으로 정리해 준 것을 유족이 보관하고 있어 선정작업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선생의 미발표작 중에는 1950-60년대의 생활상을 담은 의미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21세기의 젊은이들에게 사오십 년 전 우리네 삶의 면면을 선생의 작품세계와 더불어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다. 3×5사이즈 인화를 하면서 흑백 필름을 직접 스캔하며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때맞추어 눈빛출판사 이규상 사장도 한국사진예술의 개척자이신 백오 선생의 작품집을 출판하고자 하였기에 선생의 유작 사진집 발간을 위해 앞장서 주었다. 이 책에 수록된 백여 점의 작품은 대부분 미발표 유작이다. 선생이 평소 이웃들의 삶에 얼마나 애정어린 시간으로 밀착해 왔는지를 이 사진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행운을 감사하며 단편적이 감회를 적어보았다. 1967년부터 1983년 10월 선생과 사별할 때까지, 때로는 멀리서 가끔은 가까이서 선생과 지내 온 16년은 이제와 되돌아보니 너무도 철없이 선생께 어리광만 부렸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선생의 유작 사진작품집을 선생이 떠나신 지 22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펴낼 수 있게 되어 송구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백오 이해선 선생은 우리나라 사진 예술을 개척한 큰 별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My teacher Hae-sun Lee was the one who developed Korean photography into the art work from the simple recording device.

He graduated western fine art major from Tokyo Art School and then came back to Korea. He joined western fine art club on the recommendation of Hee-dong Koh, who was the first western fine art painter in Korea, and this was the moment Hae-sun Lee drummed up his enthusiasm of photography.

It wasn’t easy for him to pioneer the photography in such time, because his classmates disregarded him as no one acknowledged photography as an art. Also, photography was not accepted in the gallery or show, Hae-sun Lee did not even want to create photographs as a product, so his financial difficulty was unavoidable. In 1945, he founded Joseon Photographic Art Research Association, Photographic Artist Association of Korea at present.

It was 1967 that I met my teacher for the first time. I participated the study section of PAAK, right after I saw some photographs in the exhibition. It was handled in a private room of old Chinese restaurant, but I was able to feel the full of passion and energy.
I eventually joined PAAK, and he always emphasized the composition and communion with the subject to me.

Hae-sun Lee was very strict, and well-principled. I think his stubborn artistic viewpoint was from his background. He was born in 1905, when Korea was almost losing sovereignty to Japan. His grandfather was a brother of Queen Min's father-in-law, regent Heungseon, in other word, Hae-sun Lee was the second cousin of Sunjong, the last king of the Joseon Dynasty.
He married with a daughter of Minister Young-hwan Min, and their life was under repression as he was from ruined royal family. When rejected the designation of baron from Japan, he could be relatively free than other royal families.

Hae-sun Lee had numbers of palace shots, those were forced to hand over to North Korean soldiers during the Korean War, and my teacher decided to commit many of them to the flames. It is still grieving us for losing such precious heritages.

Photography was probably his special instrument to express his burdens and the misfortune of Korea, his endeavors and persistence not only inspired us but also made us feel sad and bitter. We always suggested to quit smoke, but he did not want to stop his hobby for his longevity, and my teacher Hae-sun Lee passed away at the age 78 of lung cancer.

His photographs including some of palace shots were published in 1980 and are managed by the National Office of Cultural Properties.
We had exhibitions of his photographs in 2005, many of his fellows are in the move to commemorate Hae-sun Lee’s services.

His illustrious achievements will be eternally remembered in our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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